'이주노동자와의 20년' 박천응 안산이주민센터 대표
"내가 지금 어디 있냐?" 한 이주노동자 물음이 내 삶의 화두로 새겨져
체불임금 받아줬더니 귀국해서 향락업… 그땐 정말 허탈감 들어

"도대체 내가 저분들을 위해 일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저분들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인가.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거죠. 내 현주소가 어디 있냐고."

'안산이주민센터' 대표인 박천응(47) 목사의 머리숱은 희끗희끗했다. 이주노동자문제가 사회 표면으로 알려지지 않던 시절 그는 여기로 왔다. 주민의 절반이 이주노동자인 이 공단 동네에서 '국경 없는 마을'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안산이주민센터'는 원곡본동 동사무소 맞은편 허름한 주택의 옥상에 있었다. 소파도 없는 응접실에서 두개의 큰 상(床)을 붙여 두부조림, 양파볶음 등 반찬을 양푼으로 올려놓고, 그가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밥상의 한 귀퉁이씩 차지해 밥먹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았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 밥은 서로서로 나눠먹는 겁니다"라고 씩씩한 기도 소리가 그때는 들렸다.

세월이 흐르니 거리 풍경부터 낯설었다. 비록 위치는 그대로였지만 그 허름한 주택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건물로 바뀌었다. 이제는 식사도 지하 식당에서 탁자에 앉아 먹는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의 대부(代父)격'이 된 그에게 "처음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일할 때를 돌아보면 얼마나 자신이 바뀌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저는 여전히 여기에 있잖아요. 물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초기에는 아무 사심 없이 이들의 일을 도왔는데…, 언론에 내 이름이 나오고 사람들이 알아주니 우쭐했지요. '결과적으로 나만 잘 되자고 한 게 아닌가, 내가 저분들 때문에 먹고 사는 게 아닌가' 이런 성찰을 하면서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어요. 하지만 상호 보완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해온 활동이 내 일이고 곧 이주민 일이라고 받아들이죠."

박천응 목사는“돈벌려 온 지 사흘 만에 손목이 잘린 채 멍하니 앉아 있던 이주노동자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안산이주민센터'를 개설한 1994년 어느날 아침, 출근하니 사무실 앞에서 백반증에 걸려 하얗게 탈색된 나이지리아 노동자가 신문지를 깔고 자고 있었다고 했지요. "그 모습에서 '너희 가운데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는 성경 구절을 떠올렸고 난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던 것 같다"고 말한 걸 기억합니다.

"그랬지요. 신앙적 열정에 불타올랐던 시절이었지요."

―지금은 강연과 세미나에 초청받고 정부의 정책 자문도 합니다. 현장에서 이주노동자 일을 하기에는 소위 '신분'이 너무 상승한 게 아닌가요? 이럴 경우 처음 순정(純情)이 남아있나요?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신분이나 지위가 올라갔다고 해서 처음에 가졌던 마음이 탈색된 것은 아닙니다. 역할이 바뀐 것이지요. 과거에는 앞장서 끌어갔지만 지금은 밀어주는 입장이 됐어요. 집회 현장에서도 마이크를 안 잡아요. 그럼에도 내 자리는 늘 '작은 이들'을 위한 곳에 있습니다. 물론 나이가 드니 예리한 면은 많이 퇴색돼요. 눈물이 없어지고 머리로만 따져요. 용기가 없어지고, 앞뒤와 옆도 돌아보게 됩니다. 생각이 많아지니 행동이 주저주저해지죠. 좋게 말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이지만요."

―어떤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건가요?

"한때는 이주노동자 문제로 정부와 심하게 갈등했지요.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로 보면, 법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면이 분명히 있는 거죠. 하지만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하는 정부의 고민도 이해하게 됐지요. 그래서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참여해 절충안을 내고, 법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더 갖게 됐지요."

―이주노동자 일을 한다면서 정부 입장까지 고려하면 제대로 되겠습니까?

"처음에는 이주민들을 도와주는 입장에서, 이들이 약자이니까, 부정적인 면을 보더라도 눈감아주죠.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이주민들도 스스로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단기 체류자'가 아니라 '준(準)거주민'으로서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돈을 벌도록 해줬으면 그 번 돈은 정말 가치있게, 가정의 행복을 위해 써야지요. 그런데 일부는 너무 소비향락적이 되어가는 것 같고. 이들을 위해 체불임금과 산재보상금을 받아줬는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성매매와 향락업종을 할 때 정말 허탈감이 들었죠. 내가 뭘 하고 있느냐며, 여러 상념이 교차했지요."

―신학대학 시절 운동권이었다면서요? 대학 졸업 후 공장과 빈민 현장에서 일년간 '훈련 겸' 일했다고 들었습니다.

"꼭 '운동권'이라기보다…, 우리 집안이 어려웠어요. 장로인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권사'인 어머님이 생계를 위해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오징어와 땅콩을 팔았어요. 어느날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어머님이 누구와 막 싸워요. '명색이 교회권사이신데 이러면 안 되지' 낯이 뜨거웠지요. 노점상 단속을 나온 구청 직원들이 노점 물품을 압수하자 죽자살자 덤벼들던 중이었어요. 그건 우리 생계가 걸린 것이었어요. 그때 저는 '목사가 되면 어머니 같은 사람들을 위해 목회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던 시절이기도 했지요."

―20년 전 안산 공단지역에 들어온 것은 일종의 '빈민 및 노동자 의식화'를 위한 것이었나요?

"글쎄 '의식화'와는 좀 다르고,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랄까요. '힘이 없는 자, 가난한 자, 소수자들을 위해 하는 것이 예수인 내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지요. 그런 신념으로 목회를 하려고 여기에 온 거지요."

―이주노동자들로 옮겨간 것은 1992년 어느날 동사무소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이주노동자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한국인과 통화하던 이주노동자가 '헬프 미'라고 나를 불렀어요. 모른 척 그냥 가려는데 또 불려요. '왜 그러냐'고 하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요. 어디로 가야 하는데, 현재 자신이 있는 위치를 상대에게 설명을 못해 그랬던 거죠.

그날 밤 누웠는데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물음이 계속 맴돌았어요. 그 물음이 바로 내 삶의 화두(話頭)가 됐어요. '내가 누구인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전까지는 이주노동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처음 이 사무실을 열고 알리기 위해 영어로 쓴 전단을 나눠주려 다녔어요. 전단을 받은 이들이 위치를 물으면 내 영어 실력으로 답변을 못 해요. 그래서 사무실 위치를 영어로 외운 뒤 다시 뛰쳐나갔지요."

경기도 안산시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 펄벅재단도 다문화가정 어린이집 운영을 위해 이곳에 옮겨 올 것으로 최근 보도됐다./안산이주민센터 제공

―초기에 이주노동자들은 무엇을 가장 필요로 했나요?

"문을 연 지 얼마 안돼, 천안의 공장에서 일하던 인도 노동자 4명이 도망쳐 왔어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하고 외출 외박 없이 월급으로 4만원을 받았어요. 이게 그때의 현실이었어요. 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는 공장 일을 한 지 사흘 만에 손이 잘렸죠. 브로커에게 500만원을 주고 돈 벌려왔는데, 월급 한번 못 받고 산재보상도 안 됐지요. 멍하니 병원 침대에 앉아 있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당시만 해도 이주노동자 대책이라는 게 없었어요. 처우 개선, 인권 보장, 밀린 임금 받아내는 게 가장 큰 욕구였죠. 한국말을 배우고 이곳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였지요."

―기업주 측으로부터 "당신이 뭔데 끼어드느냐"는 말을 듣지 않나요?

"그런 경우가 많았죠. 그쪽에서는 덮고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내가 나서면 열 받지요. 한번은 월급을 체불한 사장님을 찾아갔더니, 내게 너무 따지지 말라면서 '나도 교회 장로입니다'고 하더군요.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원하지 않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었지요."

―공장을 하는 기업주는 '악(惡)'이고 이주노동자들은 희생당하는 집단으로 몰고 가지 않았나요?

"그런 이분법에 매몰된 적은 없어요. 다만 이주노동자들이 약자였기에 그쪽 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거죠. 여길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들 중에는 목사인 저를 '사장님'이라고도 불러요(웃음). 임금 문제는 이제 구조적으로 많이 해결되고 있어요. 하지만 공장 자체가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면 임금 체불도 불가피한 거죠. 어쩌면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영세기업의 한계로 인해 생긴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목사님의 이미지는 '강성'이고 이념적으로는 '좌파 운동가'로 분류되더군요.

"지난 정부에서는 저를 '반한(反韓)인물'이라고도 했어요. 단속반들이 교단에서 운영하는 이 사무실로 들어와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잡아가는 걸 막으니까, 저를 50m 이상 질질 끌어갔어요. 이에 항의해 사흘간 단식도 벌였지요. 이렇게 목소리를 크게 내면 '강성'으로 보일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원칙을 '교리'처럼 경직되게 지킨 적은 없어요. 원칙을 삶의 '기본'으로 지킬 뿐이에요.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은 기본 원칙이라고 봐요. 그 사람이 잘못된 일을 했기 때문에 밥을 주지 마라,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불법체류자라 해도 도와줘야지요. 이게 좌파라고 하면 그걸 받아들이죠."

―불법체류자의 처지가 안타까워 도와주는 것이겠지만, 이는 실정법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과연 온정적인 접근이 옳은가요?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일종의 '불랙마켓(암시장)'이지요. 가령 기존의 고용시장에서 이들이 20만명이면 시장이 돌아갈 수 있어요. 25만명이 되면,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5만명을 솎아줘야 해요. 이게 단속의 개념입니다. 정부 정책은 '한쪽 눈 감기' 정책이에요. 필요하면 풀고 어려우면 단속하지요. 우리나라에는 불법 체류 10년이 넘는 사람들이 3만명이 넘어요. 이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살고 있어요. 그 아이들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거죠? 언제까지 우리는 모른 척 할 수 있나요?"

7년 전에 만났을 때도 그는 버릇처럼 비스듬한 자세로 말했다. 당시 "무엇이 가장 힘든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일 욕심이 생기고 자꾸 또 다른 일을 벌이려는 욕심이 생겨나 힘들다. 지나친 의욕이 있을 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나는 가능한 한 이 테두리 바깥으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자는 말이 나는 좋다."

하지만 세월은 그의 말대로 실행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주민노동자 상담에서 출발한 그는 이제 '국경없는 마을' 사업, 이주여성상담소, 다문화어린이집, 이주노동자 쉼터, 국제결혼 부부를 대상으로 한 기술 교육 등에도 관여한다. 허름한 주택의 옥상 사무실이 현재의 입체적인 건물이 된 것처럼.

"일을 하다보니 사업이 자꾸 확장돼요. 가령 여성이주민이 우리 사무실에 피신해있다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을 돌보는 공간이 필요해요. 모든 게 예정된 것이 아니었어요. 그 시절 우리 노동단체나 노동상담소가 이주노동자 문제에 적극 나서줬다면…. 이 점에서 섭섭한 마음이 있어요. 이주노동자를 상담하고 체불 임금을 받아주는 것은 당초 내 전공이 아니었어요."

―아니, 그러면요?

"전 종교인이고, 보다 종교인 본연의 역할이 있었을 텐데."

나는 등받이 없는 간이의자에 앉아있었다.